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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에 참전했던 남아공 공군의 활약상. 군사와 컴퓨터


딱 1년전에 올렸던 글인데 현재 남아공에서 월드컵이 진행 중이고 오늘이 6.25사변일이라서 글을 약간
수정하고 날짜를 오늘로 고쳐서 올립니다. 남아공을 비롯해서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고 목숨을 바친 수
많은 나라의 영령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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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포스팅은 그다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슈타인호프님의 이탈리아가 파병한 의료지원단에 대한 포스
팅을 보고 삘을 받아서 6.25에 참전한 국가 중 남아프리카공화국 군대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처음부터 아는 게 많지 않은데다 인터넷으로 찾은 소수의 영문 자료를 기초로 해서 번역상 실수나 잘못
된 사실관계가 나올 수 있으니 너그럽게 봐주시고 문제 있으면 지적 환영하겠습니다. 좀 글이 긴데 이
점은 매우 죄송합니다. 하다보니 그렇게 되는군요. ^^;;;

이제 들어갑니다.




(평택시에 위치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 기념비, 출처 - http://kr.blog.yahoo.com/amxnxt/4345)


1) 남아공의 한국전쟁 참여

한국전쟁 발생 직후 UN의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철수를 결의하는 한편 모든 UN 회원국들에게 이
결의안을 실행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남아공 정부는 1950년 7월 20일에 열린 내
각 회의에서 동아시아와 남아공 사이의 먼 거리 때문에 직접적인 군대 파병은 실제적이지도 않고, 불합
리하다는 판단을 1차적으로 내립니다.

그러나 이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서 비록 어려운 점은 아직 있지만 직접적인 군대 파병이 남아공 정부
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고 얼마 뒤인 8월 4일 하루종일 걸린 긴 회의를 거쳐서 남아공
공군 (SAAF) 전투기 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결정은 남아공 의회로 넘어가는데 남아공 역사
상 처음으로 의회에서 해외 파병이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됩니다.

남아공의 파병이 이렇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이유는 당시 아프리카에서 자국이 고립된 상태라고 분석
한 남아공 정부가 공산주의 확장에 강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으로 한국전쟁을 공산주의 확산의 신호탄으
로 보고 다른 반공국가들과 함께 이를 미리 저지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판단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의식이 남아공 정계 전반에 퍼져있었기 때문에 당시 남아공 수상인 다니엘 프랑수아 마런 (Daniel
François Malan)은 의회에 파병을 관철시키기 위해 특별히 애쓸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파병 결
정에 이르기까지 너무 느릿했다는 점과 의회와 상의를 제대로 안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파병 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남아공에는 공산당 (South African Communist Party)이 있었지만 1950년 6월에 통과한 공산주의 활동
금지 법안 (Suppression of Communism Act) 때문에 해체된 것도 의회의 파병 만장일치 통과의 한 요
소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공군이 공개한 `6.25참전 외국공군활약상' 중 남아공의 P-51 전투기 사진, 출처 - 공군본부)


2) 참가부대 및 준비과정

남아공 공군은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측에서 활약해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전후 소련의 베를린 차단에
맞선 베를린 공수작전에도 참여해서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남아공 정부가 공군을 파병하기로 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파병되기로 한 부대는 2차 대전 때 동아프리카 및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어 명성을
쌓은 2 Squadron (제2 비행중대)이었습니다. 지원을 자청한 1,426명의 남아공 공군 정규군 중에서 뽑힌
49명의 장교 및 157명의 병사로 구성된 이 부대는 2차 대전에 참전한 에이스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
니다.

제2 비행중대는 1950년 9월 26일 남아공의 더반 (Durban)에서 출발해서 6주의 항해 끝에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고 도쿄 외곽의 존슨 (Johnson) 비행기지에 여장을 풉니다. 이들은 같은 해 11월 전선으로
나갈 때까지 P-51D 무스탕 전투기 전환훈련 및 한반도 전황을 익히게 됩니다.

1950년 7월 UN 안보리에서 UN군의 총지휘권을 미국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또한 미 대통령에 UN군의 지
휘관 임명권을 부여한데다 미군이 UN군의 주력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아공의 제2 비행중대는 다
른 해외 비행중대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미군 부대 시스템에 통합되는 방식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UN군 사령부의 공군을 Far East Air Forces (FEAF)라고 하는데 남아공의 제2 비행중대는 FEAF의 전략
공군부대 중 하나인 미 제5 공군부대 (US Fifth Air Force) 산하 제18 전투폭격대대 (18th Fighter-Bomber
Wing, 18 FBW)에 속하게 됩니다.



(수원 K-13 기지에서 로켓탄과 네이팜탄으로 무장하고 이륙 준비를 하는 남아공의 P-51D 무스탕 전
투기의 모습, 출처 -
http://samilitaryhistory.org/vol063dm.html)


3) 드디어 본격적으로 참전하다.

제2 비행중대 중 13명의 장교와 21명의 병사로 구성된 선발대가 1950년 11월 16일 부산 동부 (K-9) 비
행기지를 향해 출발합니다. 이들 중 제2 비행중대장인 Cmdt. Theron 및 4명의 소대장들은 각자 P-51D
무스탕 전투기를 몰고 갔는데 실전 참여 전에 현지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미 공군 조종사들이 함
께 동행했다고 합니다.

부산에 도착한 지 3일 뒤인 19일 아침, Cmdt. Theron과 Capt. Lipawsky는 자신들의 무스탕 전투기들
을 몰고 두 명의 미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실전에 드디어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에 제2 비행중대의 선발대는 평양 동쪽 (K-24) 비행기지에 자리를 잡았지만 곧바로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수원 (K-13)으로 후퇴해야 했고 그 뒤 다시 진해 (K-10)로 내려와야 했었습니다. 진해
기지에서 선발대는 제2 비행중대의 본대와 합류했고 1950년의 성탄절을 같이 보내게 됩니다.

제2 비행중대는 1952년 12월까지 진해를 후방 기지로 발판삼아 수원, 서울 (K-16) 및 홍성 (K-46) 비행
장들을 전방기지로 삼아 옮겨 다니면서 활동합니다. 다만 1951년 3-4월 사이에 진해 기지를 개선하느
라 잠시 부산 동부 기지에 배치 되었었다고 합니다.

1953년 1월부터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게 되는 10월까지는 오산 (K-55) 비행기지에서 활약하게 되는
데 이 기간 동안은 새로 도입한 F-86F 세이버 전투기를 운용하게 됩니다.



(한국전동안 남아공 제2 비행중대가 운용한 F-86F 전투기,
출처 -
http://samilitaryhistory.org/vol063dm.html)


4) 그들은 어떤 임무를 담당했는가.

남아공의 제2 비행중대의 주요임무는 전황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졌지만 이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중공군의 참전으로인해 UN군이 평택-삼척까지 밀려내려간 직후인 1951년 1월 말부터 휴전협
정이 맻어진 1953년 7월 27일까지로 대부분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대지상공격 및 지상군에 대한
지원에 집중되었습니다.

평택-삼척 방어선에서 현재의 휴전선 부근까지 UN군이 중공군을 밀어올리던 동안에는 적들의 보급이
전투지역에 닿지 못하도록 적의 보급수단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제2 비행중대의 주요 임무였습니다.
이들은 P-51D 무스탕 전투기에 네이팜탄 2개 및 127mm 로켓 그리고 12.7mm 기관포로 무장하고 적
군의 주요 보급로 및 인근의 2차 보급로를 순찰하면서 타격할 대상을 물색했다고 합니다.

제2 비행중대가 각별하게 신경쓴 보급로는 서쪽으로는 서울과 사리원 사이에 복선 철로와 도로, 동쪽
으로는 원산과 장진호 사이의 교통로였는데 이들의 활약은 대단해서 미 제5 공군부대장인 패트리지
(E.E. Partridge) 중장은 1951년 4월 4일 UN군의 아침 브리핑에서 남아공의 제2 비행중대가 위장된
적군의 교통수단들을 찾아서 격파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부대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휴전선 부근까지 UN군이 도달한 이후부터는 북한 지역의 교통 기반 중 중요한 시설물들에 대한 공습
이 매일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약간 달라지게 되지만 근본적으로 적의 보급로 타격이 주임무
였고 그 사이에 가끔씩 지상의 미 8군에 대한 지원 임무가 부여되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비 중인 남아공 제2 비행중대 소속 P-51D 무스탕 전투기. 원래는 미군 기체 (USAF 44-84903)였
는데 53년 F-86F 세이버로 교체되어 미군에 돌아갔다가 나중에 우리 공군으로 옵니다.
출처 -
Swiss Mustangs)


5) 철의 삼각지대를 사수하기 위해...

그러나 제2 비행중대의 임무인 적 보급로 공격의 비율이 낮아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1951년 가
을 및 1952년 가을 무렵이었습니다.

1951년 가을, 휴전회담이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자 북한-중공군의 전력증강을 방해하고 UN군의 전의
상실 방지 및 휴전선 설정에 대비하기 위해 미 8군 사령관인 밴 플리트 (Van Fleet) 장군은 적군에 대
한 공세를 가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펀치볼 (Punchbowl), 피의 능선 (Bloody Ridge) 그리고 단장의
능선 (Heartbreak Ridge) 전투들입니다.

이때 제2 비행중대의 지상군 지원 임무의 비율이 예전보다 더 높아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제2 비행
중대 전체가 로테이션을 통해서 매일 지상군 지원에 투입됩니다. 특히 이 시기중 열흘 사이에 제2 비행
중대는 두번이나 1일 전투출격 (Combat Sorties) 회수 자체 기록을 경신합니다.

1951년 9월 26일에는 총 40회의 출격 회수를, 10월 4일에는 총 48회의 출격 회수를 기록하게 되죠. 더
욱이 10월 4일에 세운 기록은 그 날 하루 제2 비행중대가 보유한 P-51D 무스탕 전투기가 단 15대만 있
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것이라고 합니다.

1952년 가을에 다시 한번 지상 지원에 대한 비율이 높아지는데 이때는 휴전협상 결렬 이후 양측이 서
로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목적으로 공세를 일으키는데 철의 삼각지대 (Iron Triangle)을 포함한
주저항선 (MLR) 부근이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제2 비행중대도 이러한 변화에 맞춰서 아군의 고지 사수 및 탈환에 지원을 보태게 됩니다. 이 당시에
는 양측이 해가 뜰 무렵 (새벽녘)과 해가 질 무렵 (초저녁)에 공세를 가했기 때문에 미 제5 공군부대
는 새벽녘과 초저녁 때 일정한 수의 전투기들을 즉시 출동시킬 수 있는 대기상태로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걸 영어로는 Strip Alert라고 불렀는 데 미리 전투기들에 대한 점검을 마치고 활주로 끝에 기체를 옮
기고 엔진을 끈 상태로 조종사들이 조종석에 대기하고 있다가 출격 지시가 떨어지면 바로 이륙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륙 후 특정 관제사가 임무를 알려주고 그 다음에 전방 관제사가 목표물을 지시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당시 한국군, 미군 및 UN군이 사수하던 고지에 대한 공격이 갑작스럽고 긴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상군 지원을 위해 준비 중인 남아공의 P-51D 무스탕 전투기. 이 기체도 원래 미군 소속 (USAF
44-84882)으로 1952년 12월 미군에 되돌려줬다가 우리 공군에 옵니다. 출처 - Swiss Mustangs)


6) F-86F 세이버 전투기로 갈아타다.

1953년부터 남아공의 제2 비행중대는 P-51D 무스탕에서 F-86F 세이버 전투기로 갈아타게 됩니다. 이
때부터는 적 보급로에 대한 공격 및 지상군 지원 비율이 줄어들면서 대신 제공 (Counter-Air) 임무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게 됩니다. 51년부터 52년까지 고작 13회의 출격이던 제공임무가 1953년의 단 7개
월 동안 32회로 급증했을 정도니까요.

제2 비행중대의 제공임무는 1) 폭격기 보호 및 적 전투기 요격 임무, 2) 적 비행장과 인근 시설을 폭격,
3) 정찰 임무로 나눌 수 있는데 1953년 3월 동안 적 전투기 요격 임무가 많았고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적 비행장 공략이 임무의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제2 비행중대의 임무가 달라진 것은 1953년 정세
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1953년 4월 양측이 한반도에 더 이상의 병사와 장비를 투입하지 않는다는 타협을 하게 되는데 막상 비
행장을 재건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항이 없는 헛점이 생깁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중공군은
이런 헛점을 이용해서 35개 이상의 비행장을 재건하고 있었는데 이를 놔두면 북한-중공군이 공군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UN군은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는 공군력의 우세를 잃지 않기 위해서 북한의 비행장들을 타격해
야만 했고 남아공의 제2 비행중대들도 참여하게 됩니다. 1953년 5월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7월까지
수시로 북한 비행장 및 인근 시설 공습을 위해 출격하게 됩니다.

심지어 휴전협정이 맻어지는 당일까지 임무를 수행하는데 그 날 제2 비행중대의 주임무는 압록강과 청
천강을 통해서 전투기들을 북한에 들여오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것이었는데 제2 비행중대의 F-86F 전
투기 14대는 41회의 출격으로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임무를 수행합니다.



(1953년 오산 기지에서 점검을 받고 있는 남아공 제2 비행중대 소속 F-86F 세이버 전투기의 모습
출처 - http://kalaniosullivan.com/OsanAB/OsanSongtanb1.html)


7) 여러분 덕분에...

한국전쟁 동안 남아공의 제2 비행중대는 P-51 무스탕 전투기로는 총 10,569회, F-86F 세이버 전투기로
는 총 1,454회의 출격을 기록했고 이는 한국전쟁 동안 UN군 전투기들의 총 출격 회수인 352,023회의
3.4%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단순 수치로 보면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제2 비행중대는 UN군에 속한 62개
비행중대의 평균보다 높은 전과를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2 비행중대가 파괴한 다리는 총 46개인데 이는 UN군 평균 19개보다 훨씬 높습니다. 적 비
행장 및 대공포 파괴도 UN군 평균의 2배 이상을 기록했고 그 외 건물과 철로 파괴도 UN군 비행중대의
평균 이상이었습니다. 탱크 및 군용차량 그리고 적군 사살도 UN군 평균에 근접하는 수치를 나타냈습니
다.

이렇게 높은 전과를 거둔 제2 비행중대지만 그만한 전과에는 희생이 따랐습니다. UN군 비행중대당 평
균 19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반면, 제2 비행중대는 35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또한 조종사 8명이 포로
로 잡히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전쟁 중에 이들에게 보급된 P-51 전투기 97대 중 79대, F-86F 세이버 전
투기는 22대 중 4대가 손실되었습니다.

제2 비행중대는 이런 활약으로 총 797개의 메달과 2개의 은성 훈장 (Silver Star, 미군을 제외한 참전국
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훈장)을 비롯해서 3개의 공로훈장 (Legions of Merit), 55개의 공군 수훈
십자 훈장 (Distinguished Flying Cross), 40개의 청동성장 (Bronze Star)를 수여받았습니다.

또한 미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 (Presidential Unit Citation)을 받는 영광을
누립니다. 미국의 대통령 부대 표창은 미국을 제외한 참전국들 중에서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터키,
그리스 등이 받았는데 모두 육군이었고 공군은 남아공의 제2 비행중대가 유일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도 공군은 남아공이 유일하구요.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우리들에게는 넬슨 만델라, 인종차별정책을 취했던 나라, 2010년 FIFA
월드컵 개최국, 에이즈 및 범죄가 만연한 나라, 금과 다이아몬드의 나라로 대부분 알려져 있었을 겁
니다. 특히 오랜동안 행했던 인종차별정책 때문에 이미지가 그다지 좋은 편도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남아공은 6.25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파병부대 조종사들 및 장병들은
휴전협정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임무를 수행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이렇게 다시 잘 살 수 있
는 나라로 발전하는데 도움을 준 나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
서 이 게시물을 올립니다.



(남아공 프리토리아시의 Union Building에 위치한 한국전 추모 명판, 출처 - 위키피디아)

정보 출처 -
http://www.korean-war.com/soafrica.html 
http://samilitaryhistory.org/vol063dm.html
http://en.wikipedia.org/wiki/2_Squadron_SAAF 
http://en.wikipedia.org/wiki/South_African_Air_Force
http://en.wikipedia.org/wiki/Presidential_Unit_Citation_(US)
http://en.wikipedia.org/wiki/Presidential_Unit_Citation_(Korea)



덧글

  • 토르끼 2009/06/25 23:47 #

    재밌게 읽었습니다. 의외로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에 관한 부분은 우리나라에선 많이 다루지 않는데 간혹 찾아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더군요. 여하간, 우리 조국을 수호하는데 그 세는 미약했지만 큰 힘이였던 남아공 공군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dunkbear 2009/06/25 23:52 #

    공군부대 하나 보낸 남아공에 대한 내용이 이 정도니 다른 국가들은 뭐... ^^;;;
  • rumic71 2009/06/25 23:51 #

    로디지아(짐바브웨)를 제외하면 아프리카 지역에 전술적으로 가장 영향을 준 게 남아공 군대지요.
  • dunkbear 2009/06/25 23:53 #

    그렇겠죠.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차륜형 자주포 등 독자적인 무기체계를 갖춘 국가이기도 하니...
  • rumic71 2009/06/25 23:55 #

    한때 남아공 무기체계가 이스라엘과 흡사했습니다. 인종차별 때문에 다른 나라들은 남아공에 무기 금수를 취하고 있었는데 옳다구나 하고 이스라엘에서 엄청 무기를 팔았었지요. (중동전쟁 초기 프랑스가 이스라엘에 무기 수출하던 게 연상되는)
  • dunkbear 2009/06/26 00:26 #

    남아공은 무기 개량에 많은 역량을 투입한 점에서도 이스라엘과 흡사하죠. 센츄리온 전차를 개량한 올리판트 전차나 SA330 푸마 헬기를 개조한 Oryx 헬기... 아, 그리고 푸마 헬기에서 파생된 루이발크 공격헬기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흠..
  • deiceed 2009/06/26 00:43 #

    참전 기념비 뒤로 보이는 아파트가 저희 집입니다.(10#동 20#호)
    정확한 위치는 안성(평택)인터체인지 바로 옆입니다.
  • dunkbear 2009/06/26 00:46 #

    오오... 그렇군요. ^^
  • ghistory 2009/06/26 00:49 #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된 시점은 1961년으로, 커먼웰스를 탈퇴하고 기존 '남아프리카연합' 을 개명한 결과입니다.

    제가 굳이 Union을 '연합' 이라고 번역한 건 연방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Union은 기존 브리튼령 식민지에 아프리카너인들의 독립국가들을 합병해 묶어놓은 곳들이라 붙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 dunkbear 2009/06/26 00:50 #

    아, 그렇군요... 어쩐지 자료 몇군데에서 Union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해서 왜
    그런가 했습니다... ㅠ.ㅠ 이제와서 고치기도 좀 그렇고 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
  • ghistory 2009/06/26 00:51 #

    Suppression of Communism Act: 사실 이건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모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반대운동들을 탄압하려는 목적이 있었기도 했지요. 행정부가 '공산주의' 라고 규정하는 모든 활동을 탄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 dunkbear 2009/06/26 00:54 #

    공산주의 금지라는 명칭만으로도 별로 좋게 들리지 않았는데 더 깊고 안좋은 배경이 있었군요.
    참전한 용사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이런 국가가 우리를 도왔나 하는 자괴감도 약간 드네요. ㅜ.ㅜ
  • ghistory 2009/06/26 01:20 #

    사실 그때 국제연합국 참전국들 가운데: 1당독재 공화국 터키/군부가 감시하던 타이/황제 전제정 에티오피아/우파 독재 그리스/보수당 독재 콜롬비아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기준미달인 나라들이었죠.
  • rumic71 2009/06/26 01:48 #

    뭐 어차피 한국 자체가 당시로선 한참 미달...
  • ghistory 2009/06/26 01:49 #

    이런 미달이들을 봤나.
  • dunkbear 2009/06/26 08:05 #

    결국 미달이들이 미달이를 도운거군요... ㅡ.ㅡ;;;
  • ghistory 2009/06/26 00:57 #

    D.F. Malan: 다니엘 프랑수아 마런(Daniel François Malan).

    아프리칸스어는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았지만, 오랜 격절의 결과로 상당수 발음들이 크게 다릅니다. 일일이 확인안하면 모르지요.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Daniel_Fran%C3%A7ois_Malan#Biography
  • ghistory 2009/06/26 01:01 #

    Durban: 더반입니다.
  • dunkbear 2009/06/26 01:10 #

    마런과 더반 지적 감사합니다.

    링크해주신 마런에 대한 내용을 보니 그가 2차 대전 참전을 반대한 대목이 흥미롭군요.
  • ghistory 2009/06/26 01:14 #

    당연하죠! 원수인 영국놈들을 돕다니 당치도 않은거죠. 그때 남아프리카 아프리카너들 가운데 나치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 rumic71 2009/06/26 01:47 #

    대전 때 중동에서도 그 비슷한 일들이 있었죠.
  • ghistory 2009/06/26 01:48 #

    rumic71/ '적의 적은 나의 친구' 라는 거겠지요.
  • ghistory 2009/06/26 01:19 #

    Johnson: 당연히 존슨입니다.

    Pretoria: 프리토리아.

    '대통형' 부대 표창→대통령 부대 표창.
  • dunkbear 2009/06/26 01:24 #

    크억... 오타마저... ㅠ.ㅠ
  • rumic71 2009/06/26 01:47 #

    2대 정권에 걸쳐 '대통령의 형'이 물의를 빚었으니 그럴만도.
  • ghistory 2009/06/26 01:48 #

    설마 잠재한 무의식의 발현인 겁니까.
  • dunkbear 2009/06/26 08:06 #

    아니, 그건 아닌데... ^^;;;;
  • 위장효과 2009/06/26 08:59 #

    저기 참전 기념비근처에도 곧잘 놀러가고는 했습니다. (고향은 평택이 아닌데 어쩌다보니 본가에서 오래 사셨거든요.)
  • dunkbear 2009/06/26 09:18 #

    그러셨군요. 참전기념비 가보신 분들이 많으시네요. ^^
  • 위장효과 2009/06/26 10:02 #

    아마도,할아버지께서 그때 참전하셨는지라-군의관이지만^^- 그쪽 찾아다니는 걸 좋아하셨던 덕이 큽니다. 어릴 때 저쪽 원주가는 길에 있는 콜롬비아 참전 기념비도 본 적이 있고요-콜롬비아 맞았나????하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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